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羽溪先史(우계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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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사(先祖史) 주요인물들

우리 종족(宗族)의 발상(發祥)은 고려중엽인 인종(仁宗)때 경주이씨(慶州李氏) 48대 복야공(僕射公) 이양식(李陽植)으로, 고려 인종17년 기미년 1139년 문과(文科)에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직함(職銜)이 문하성(文下省) 중서사인(中書舍人) 및 상서성(尙書省) 좌복야(左僕射)에 올랐으며 고매(高邁)하고 강직(剛直)한 기상(氣像)은 강상(綱常)의 도(道)를 다하여 조야(朝野)에 칭송(稱頌)이 자자하여 그 공덕(功德)을 기려 고려명신록(高麗名臣錄)에 기록되어 있고 역대 자손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위대한 조상의 혈통과 얼을 이어 전통적으로 타고난 충절(忠節)을 생명으로 군왕(君王)을 섬기고 인덕(仁德)으로 백성을 다스려 공성명수(功成名遂)하고 문장거필(文章巨筆)이 출중하여 경전의 도리를 지킨 문무(文武) 장신(將臣)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시조(始祖)께서는 만년에 낙향하여 강릉속현(江陵速懸)인 우계현(羽溪懸)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분적(分籍)하였다.

2세(世) 휘(諱) 순우(純祐)는 고려 1164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명조 16년에 공역승(供驛丞) 겸(兼) 직한림원(直翰林院)때 왕명을 받들어 유창(乳瘡)으로 고생하는 왕태후(王太候)를 위해 기도문을 지음으로 왕(王)의 신임을 받아 友正言(우정언), 지제고(知制誥) 국자제주(國子祭酒), 간의대부(諫議大夫)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한뒤 태자빈객(太子賓客)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거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에 이르렀으며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나 고려명종(高麗明宗) 27년 1197년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의 난이 일어나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인성(李仁成)과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 등 36인이 화(禍)를 입었다 라고 고려명신록(高麗名臣錄) 2권 4-5페이지에 기록이 있다.

5세(世) 예빈경(禮賓卿)휘(諱) 구(球) 초휘는 옥(沃) 공(公)은 일찍이 고려 충렬왕 8년 1283년 원(元) 나라에 들어가 약관 18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환국(還國)후 고려조정에 중용(重用)되어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으며 당대(當代)의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특히 詩文(시문)에 능하였으며 삼척죽서루(三陟竹西樓)에 그 시문과 더불어 오늘에까지 명성이 전래되고 있다.

6세(世) 옥천부원군(玉泉府院君) 휘(諱) 녹후(祿厚) 고려 충숙왕 10년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대사헌(大司憲) 문하시중(文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내시고 품질(品秩)이 정1품(正一品)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옥천부원군(玉泉府院君)의 작위를 받았다.

8세(世) 원수공(元帥公) 휘(諱) 억은 고려 공민왕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유장(儒將)으로 강계원수(江界元師)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재임중 우왕 14년 1388년 원사(元師) 홍인계(洪仁桂)와 더불어 선봉으로 요동을 공격(療東征伐)하여 적군을 격멸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재차 원정하여 요동정벌시 이성계(李成鷄)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국(開國) 하고 공(公)에게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事事)의 높은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공(公)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 라는 절의(節義)하에 소백산(小白山)아래 순흥땅에 퇴거(隱居)하였다. 태조(이성계)는 여러차례 소명(召命)하였으나 불응하자 태조는 교지를 내려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下賜)하였으며 그 사실이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2세(世) 휘(諱) 수형은 공(公)의 호(號)는 도촌(지금의경북 봉화군 도촌리)으로 약관(弱冠) 17세(歲)때 평서서령(平市署令; 평시서의 우두머리)으로 출사(出仕)하여 벼슬이 음보(蔭補)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으나 단종임금이 수양에게 양위할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을 때 나이 21세였다. 동료와 더불어 원주 치악산 바위에 충절을 맹세하고 관직(官織)을 버리고 영주(榮州) 도촌(桃村)에 은거(隱居)하였다. 공(公)과 세조(수양)임금이 등극하기 전에 교분(交分)이 두터웠던 사이라 여러번 음식을 하사(下賜)하고 힘껏 기용(起用)하려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의(節義)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공(公)은 은거하면서 공북헌(拱北軒)을 세우고 공수북향(拱手北向; 영월을 향하여 팔장을 끼고 엎드림) 충거애국(忠居愛國)하다가 단종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성복애모(成服哀慕)하셨고 사후(死後)에는 사림(士林)에서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하고 도계서원(道溪書院)에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주벽(主璧)으로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도촌공(桃村公) 수형(秀亨) 및 후에 취사공(炊沙公) 여빈(汝빈) 네 어른을 사림(士林)에서 배향(配享)하여 왔으나 대원군 섭정때 서원철폐(書院撤廢)정책에 의하여 지금은 도계서원(道溪書院) 건물만 남아 있다. 철종(哲宗) 9년에 승정원좌승지(承鄭院座承旨)와 고종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에 추서(追敍)되었다.

12세(世) 참판공(參判公) 휘(諱) 득성(得成) 문종 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언(正言)에 이르렀으나 단종(端宗) 폐위(廢位)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척주(陟州) 남쪽 교가(交柯; 지금의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교가)에 퇴거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 추서(追敍)되었다.

16세(世) 휘(諱) 여빈, 號(호)는 炊沙(취사)이며 宣祖(선조), 1591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고 160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벼슬하는데 뜻이 없었다. 전은소(全恩疏)를 지어올리고 관문외(關門外)에서 복합(伏閤)한지 3일이 되었으나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하자 감곡(鑑谷)으로 퇴거(退去)하여 인수정(因樹亭)을 짓고 시문(詩文)으로 소일(消日)하니 학덕(學德)이 높고 유집(遺集)이 많았다.

17세(世) 충장공(忠壯公) 휘(諱) 복남(福男) 공(公)은 이조선조때 무과(武科)에 등과(登科)하여 라주판관(羅州判官) 남원부사(南原府使)를 거쳐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道使)로 재임중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만나 남원성(南原城)에서 고군용전(孤軍勇戰)하다가 순절(殉節)하여 충혼의백(忠魂義魄)을 추송(追頌)하여 숭정대부(崇政大府)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를 증직(贈職)하고 지금도 남원충열사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특기(特記)할 일은 정유재란시 공의 셋째아들이 휘(諱) 경보(慶甫)가 7세의 어린나이로 왜군에게 유질(留質) 볼모되어 일본(日本)에서 살아온 공의 후손들이 장주이가(長州李家)로 정성(定姓)하고 일본국에 귀화한 이방인(異邦人)의 신분이기는 하나 그들이 뿌리를 찾아와 대동보에 해외편으로 합보한 것은 길이 빚나는 일이다. 대표인물이 일본국의 문학박사(文學博士)로 역사학을 전공한 노령의 이가정문(李家正文) 박사이다.

19세(世) 송곡공(松谷公) 휘(諱) 서우(瑞雨) 공(公)은 현종 1년에 등과(登科)하여 정언(正言) 동래부사(東萊府使) 홍예문(弘藝文)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 사조참판(四曹參判) 및 가선대부(嘉善大夫)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과 오도백(五道伯 ;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의 관찰사을 역임하시고 시문(詩文)과 특히 글씨에 뛰어나 송파유집(松坡遺集) 20권과 문수사(文殊寺)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의 전액(篆額)이 유필(遺筆)로 명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