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에서 분적 우계이씨역사 > 경주이씨에서 분적
         

경주이씨에서 분적(分籍)

우리 나라의 이씨(李氏)는 대체로 한국계(韓國系)와 중국계(中國系) 및 기타계(其他系)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계는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분적.分籍) 나간 것으로
차성이씨(車城李氏,위((渭))[알평~33세])
합천이씨(陜川李氏 개(開)[알평~39세])
평창이씨(平昌李氏 윤장(潤張)[알평~39세])
가평이씨(加平李氏 윤원(潤遠)[일평~39세])
아산이씨(牙山李氏 주좌(周佐)[알평~41세])
재령이씨(載寧李氏 우칭(禹칭)[알평~42세])
우계이씨(羽溪李氏 양식(陽植)[알평~48세])
진주이씨(晋州李氏, 군재(君梓)[알평~53])
원주이씨(原州李氏 반계(攀桂)[알평~58세])

이상 아홉개 성씨는 기록과 문헌 및 고증(考證)이 확실하다. 하지만

금구이씨(金溝李氏)
덕은이씨(德恩李氏)
흥양이씨(興陽李氏,별[알평~59세 ?])
영천이씨(永川李氏)
진위이씨(振威李氏)

기록이 애매하고 분명치 않으나 경주이씨에서 갈라겨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자료원:경주이씨분적도)

중국계로는 다음과 같은 성씨들이 있다.
고성이씨(固城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연안이씨(延安李氏), 정선이씨(旌善李氏), 청해이씨(靑海李氏), 태안이씨(泰安李氏), 태원이씨(太原李氏), 평산이씨(平山李氏) 등이 이에 속한다. 기타계로는 안남국(安南國: 현재의 월남(越南)의 왕 이천조(李天祚)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우리 나라로 망명하여 옹진반도 화산(花山)에 정착하여 산 화산이씨(花山李氏)와 김알지 후손인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한 광산이씨(光山李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자료원:전주이씨)

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 : 李氏, 崔氏, 鄭氏, 孫氏, 裵氏, 薛氏)의 하나로 우리 나라 이씨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으로 현재 이알평 시조로부터 오늘날 75세(世) 희(熙)자 항렬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가졌다.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瓢岩公) 이알평(謁平)은 기원전 177년 한무제(漢武帝) 6년 갑자(甲子)에 하늘로부터 진한(辰韓)땅의 표암봉(瓢岩峰)인 박바위(지금의 경주)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서 부족을 다스리며 혁거세(赫居世)를 양육시켜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6부 촌장의 의장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여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先驅者)였다.

서기 32년(신라 3대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경주)을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하였으며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후 후손들은 알평의 36세손으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수 있는 신라 진골출신인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을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 왔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거명의 17세손(고려말기)에서 8파로 대별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된다. 전통의 명문거족인 경주 이씨는 고려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공신 학자 명신을 배출하여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시조 양식(陽植)은 본시 이알평의 48세손(소판공 거명의 13세손)으로 고려조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였고 아들 순우는 의종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를 지냈으며 경주에서 우계(강릉의 속현)로 이주한 후 양식의 5세손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우계로 하여 세계(世系)하였다.